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8.15 광복 (문단 편집) == 8월 16일 == [[파일:attachment/gwangbok2.jpg]] 다음날이 되자 비로소 조항 내용대로 형무소에 있었던 정치범과 경제범이 석방되기 시작했다.[* 위의 사진은 그날 아침 9시 마포형무소에서 출소한 [[독립운동가]]들이 광복을 환호하는 모습이며 이들 중 기를 높이 든 사람이 서대문형무소 출소자이자 단파방송 연락운동 관련자인 [[https://jc21th.tistory.com/m/17780210|성기석(1920~1990)]]이다. 저 사진은 금성출판사의 [[한국근현대사]] 교과서의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그때서야 [[경성부|경성]][* 지금의 [[서울특별시|서울]]([[경기도]] 서울시로 바뀐 건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완전히 항복서를 적은 [[9월 2일]]이다.)] 시민들은 어제 방송이 일본 [[쇼와 덴노|천황]]의 [[옥음방송|항복 방송]]인 줄 알게 되었고 해방을 환호하기 시작했다. [[3.1 운동]] 이후로 [[태극기]]를 모조리 압수당한 지 26년이 지났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민들은 대한제국 시기를 경험했던 노인들 또는 중장년층들이나 어렴풋한 기억으로 태극기를 그리고 청년층 아래로는 생전 처음 태극기를 보는 상황이었다. 애당초 태극기의 형태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제강점기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광복 당시 태극기 문양이 맞네 틀리네 하는 서술 자체는 의미가 없다. 독립문과 가까운데 살았던 지역 주민들은 독립문 태극기를 보고 태극기를 그렸지만 급한대로 기존에 있던 [[일장기]]에 아래쪽을 먹칠하고 사괘를 그려 태극기를 만들어 사용한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전국 각지에서 파도처럼 휘몰아쳤던 광복의 기쁨은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2> {{{+2 '''8.15 광복 전후의 모습'''}}}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gwangbok3.jp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rt_1491874605.jpg|width=100%]]}}} || || [[경성부]] || [[서울특별시|경기도 서울시]] [[휘문중학교]] 앞 여운형 연설 모습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gwangbok4.jp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gwangbok5.jpg|width=100%]]}}} || || [[광주광역시|전남 광주부]][* 아직까진 광역시(직할시)로 승격되기 전이기에 전남 광주가 맞다.] || 전남 [[광양시|광양군 광양읍]][* 조선도 아니고 한국도 아닌 "'고려독립축하"'라는 문구가 보인다.] [[http://axium.egloos.com/v/4486788|출처.]]^^글 삭제됨^^ || 그대로 시민들은 계동에 있는 [[여운형]]의 집에 몰려가 연설을 해 달라고 요구하였고 여운형은 집 바로 뒤에 있는 [[휘문고등학교|휘문중학교]] 운동장으로 가서 광복을 맞이하는 연설을 했다.(위 사진 참고) > "조선민족의 해방의 날은 왔다. 어제 15일에 원등(엔도 정무총감을 말한다)이가 나를 불러가지고 '과거 두 민족이 합하였던 것이 조선에게 잘못 됐던가는 다시 말하고 싶지 않다. 오늘날 나누는 때에 서로 좋게 나누는 것이 좋겠다. 오해로 피를 흘리고 불상사를 일으키지 않도록 민중을 지도하여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나는 5가지 조건을 요구하였다. 우리 민족해방의 제일보를 내딛게 되었으니 우리가 지난날의 아프고 쓰리던 것을 이 자리에서 다 잊어버리고 이 땅에다 합리적·이상적 낙원을 건설하여야 한다. 이때는 개인적 영웅주의는 단연 없애고 끝까지 집단적으로 일사불란의 단결로 나아가자! 머지않아 연합군 군대가 입성할 터이며, 그들이 오면 민족의 모양을 그대로 보게 될 터이니 우리들의 태도는 조금도 부끄럼이 없이 하자. 세계 각국은 우리들을 주시할 것이다. 그리고 백기를 든 일본의 심흉을 잘 살피자. 물론 우리는 통쾌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에 대하여 우리들의 아량을 보이자. 세계문화 건설에 [[백두산]] 밑에서 자라난 우리민족의 힘을 바치자. 이미 전문·대학·중학생의 경비대원이 배치되었다. 이제 곧 여러 곳으로부터 훌륭한 지도자가 들어오게 될 터이니 그들이 올 때까지 우리들의 힘은 적으나마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연설은 중간에 [[소련군]]이 [[서울역]]에 도착했다는 이상한 소문이 나면서 군중들이 서울역으로 몰려가면서 중단되었다. 소련군의 경성 입성 소문 헛소문의 실상은 조선인들의 습격을 두려워한 [[조선총독부]] 관료들이 변절자들을 동원해서 벌였던 공작이었다. [[http://magazine.joins.com/monthly/article_view.asp?aid=279925|#]] 곧 여운형은 기존에 자신이 운영했던 비밀결사 조직인 [[조선건국동맹]]을 기본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조직하였고 [[YMCA]] 건물에서 건준 강령[* 강령은 다음과 같다. 1.우리는 완전한 독립국가의 건설을 기함. 2. 우리는 전 민족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기본 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민주주의적 정권의 수립을 기함, 3. 우리는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국내 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며 대중생활의 확보를 기함.]을 발표하였다. [[파일:external/www.jabo.co.kr/0814112838my2.gif]] YMCA 건물의 건준회의에서 연설하는 여운형. 그리고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 [[안재홍]]은 며칠간 전국에 조선이 광복되었다는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조선인들은 거리로 쏟아져나와 며칠간 광복을 환호하며 태극기를 흔들었고 집집마다 태극기를 게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